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임팔 전투 (문단 편집) === 각지의 반대, 그러나 파벌로 승인된 계획 === 물론 [[일본군]]에 무타구치 수준으로 눈 뜬 장님들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당시 15군 참모장으로 육군 소장 오바타 노부요시(小畑信良)가 부임했는데, 오바타는 20년 넘게 병참 업무만 담당해온 인물이었다. 오바타 소장은 '1만 5천 톤에 달하는 물자를 어떻게 보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자 현지조사로 진격로를 면밀하게 검토한 뒤 '자동차도 모자란 판국에 비만 오면 못 쓰게 되는 도로, 다리도 없는 친드윈강, 험준한 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보급을 어떻게 하란 말인가. 불가능하다.'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제출했다. 하지만 무타구치는 "'''나약한 소리'''"라면서 무시하고, 오바타를 전투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부임 1달 만에 해임했다. 오바타 노부요시는 이 이후 [[관동군]]으로 전보되었고, 패전 후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귀국해서 1976년에 향년 79세로 죽었다.[* 다만 얼마 후([[제2차 괌 전투]]) 이 사람의 친형인 오바타 히데요시 31군 사령관이 마리아나 전역에서 일본군 특유의 무모함으로 '군 사령관 옥쇄'라는 비극을 맞았다. [[태평양전쟁]]의 군 사령관으로서는 거의 첫 사례였다.] 15군 산하의 33사단장 육군중장 야나기타 겐조(柳田元三)와 31사단장 육군중장 [[사토 고토쿠]]도 들고 일어났지만, 역시 무시당했고 오바타 참모장의 해임 이후에 반대여론은 사그라들었다. 이 작전을 검토하기 위해서 랑군에 모인 상급부대 참모들도 신나게 까대기는 마찬가지였다. >버마 방면군 나카 에이타로(中永太郞) 참모장[* 오바타 노부요시가 보급 전문가라면 이 사람은 수송부대 쪽에서 나름 짬밥이 굵은 사람이었다. 보급과 수송의 최고 전문가들을 참모라고 두고도 그 사람들 의견은 죄다 씹고 저 쪽에서 최악의 작전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 후방에서 보급이 어렵지 않도록 3개 사단의 배치를 재고해야 한다. >남방군 이나다 마사즈미(稻田正純) 참모장: 보급계획을 도외시한 이 작전구상은 실패할 위험성이 높다. >[[대본영]] [[사나다 조이치로]](眞田穰一郞) 작전과장: '''작전구상이 엉망진창이다.''' 이런 반응이 나올 만도 한 게, 이때는 바야흐로 과달카날 전투가 끝나고 [[미군]]의 전면 공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레이드는커녕 본진 막기에도 급급한 상황. 그러나 [[도조 히데키]]의 입맛에는 딱 맞는 계획이었다. 대본영은 8월에 준비 명령을 내렸고, 이나다 참모장이 계속 반대하자 10월에 갑자기 해임했다. 이 해임은 육군성 차관 [[도미나가 교지]]의 작품이었다. 무타구치는 작전을 위해 직속상관 카와베를 이렇게 설득했다. >각하와 저에게는 이 전쟁의 근원이 된 지나 사변을 일으켰다는 책임이 있습니다.[* 사실 저 [[중일전쟁|지나 사변]]은 애초에 무타구치 렌야가 단독으로 저지른 것에 가깝다. [[루거우차오 사건#s-3.3|노구교 사건]] 참조.] 그러니 이 작전을 성공시켜 국가에 면목이 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작전 구상을 두고 열린 회의에서 남방군 총참모부장 아야베 키츠주(綾部橘樹)한테 이렇게 말했다. >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영국군은 약하오. 반드시 퇴각할 거요. 보급에 대한 우려는 착각이라 할 수 있소. 이 말을 듣고 참모장 나카가 "이 작전 구상은 너무나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되오. 재고의 여지는 없는가?"라고 물었지만 무타구치는 "당신은 실전 경험이 없어서 지레 겁을 먹는 모양이지만, 이렇게까지 준비를 철저하게 한 싸움은 일찍이 없었소이다. 천장절(天長節: 4월 29일)[* [[황제]]의 생일을 가리키는 [[중국]]식 한자용어로, 천장지구(天長地久)란 사자성어에서 따와서 '황제께서 하늘과 땅처럼 오래 사시길 바란다.'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과거 일본에서는 천황의 생일이란 의미로 사용했다. (양력으로) 메이지 시절에는 11월 3일, 다이쇼 시절에는 8월 31일, 쇼와 시절에는 4월 29일이었다.]까지는 임팔도, 코히마도 반드시 점령해 보이겠소."라고 자신했다. 그 말을 듣고 나카는 말을 아꼈다. 이때 남방군의 보급을 담당하던 이마오카 유타카(今岡豐) 군수참모가 다시 제동을 걸었다. "말씀하신 대로만 진행된다면야 어떻게든 될 것 같소. 하지만 사단이 적에게 발목을 잡힌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오." 그러자 이번에는 작전참모 키노시타가 얼굴까지 빨개지면서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하며 나섰고 결국 모두가 "아, 그렇습니까?" 하고 말한 뒤 더 이상 반론하기를 포기했다. 결국 총참모부장 아야베는 계획의 인가를 상급부대에 요청했는데 노구교 사건 때도 무타구치의 직속 상관이었던 버마 방면군 사령관 카와베는 아래와 같은 헛소리를 하면서 통과시켰다. >예전부터 무타구치 군이 공들여 계획한 작전이다. 꼭 인가해주고 싶다. 카와베가 이 작전 계획을 인가해준 것은 무타구치와 카와베가 노구교 사건 이전부터 절친한 사이었기 때문이다. 카와베 자신은 정을 생각해 '절친이 고생해서 만든 작전이니 기 한 번 북돋아주자.'는 심경으로 통과시켜 준 것이겠지만, 이는 대규모 전력 상실과 그로 인한 남방 전선 붕괴를 초래함으로써, 그렇지 않아도 이미 예정된 셈이던 일본 제국이 패망하는 시기를 더 앞당겼다. 카와베가 생각이 똑바로 박힌 절친이었다면, 무타구치가 이 계획에 힘을 쏟음을 알았다면 현실을 일깨우며 막아야 했다. 이를 두고 버마 방면군 작전참모인 육군소장 카타쿠라 타다시(片倉衷)는 '우리 군사령관은 개인 감정에 치우치는 바람에 무타구치의 행동을 막으려고 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남방군사령관 데라우치 히사이치(寺內壽一)[* 1879-1946. 초대 [[조선총독]]이자 [[무단통치]]로 악명 높은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아들이다.]도 반쯤은 자포자기의 심정이었는지, 아니면 자기 파벌의 입지를 높이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지휘관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를 하면서 이를 통과시켰다. >이 작전을 성공시켜서 교착 상태의 전국을 타개할 수만 있다면… 이렇게 작전안과 쓰레기 사이의 무언가가 각종 결재 단계를 통과하자 이 작전 계획을 보고 "작전 구상이 엉망진창이다." 하고 처음부터 제동을 건 대본영 참모장 사나다 조이치로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제동을 걸었다. >비행기도 자동차도 없는 상황에서는 절대 반대다. 작전 수행을 위해서는 도로 건설을 위한 기간 1년이 필요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면 해로수송을 위한 해군의 협조라도 있어야 한다. [[일본군]]이 아닌 타국의 군대라면 "육군 독자적으론 어렵고 해군과 같은 타군의 협조가 따로 필요할 정도로 무리한 작전이다"와 같은 상식적인 수준의 비판이겠으나, 당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일본군에서 육군과 해군간 사이]]가 어떠했는지를 고려하면, 육군 장성에게 해군의 협조를 받으라고 권하는 진언은 받아들여지긴커녕 찍혀서 모가지 당할 걸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게다가 사나다 조이치로는 무타구치 렌야의 육군대학 후배였다.[* 무타구치는 1917년에, 사나다는 1927년에 졸업했다.] 파벌과 연공서열을 엄청나게 따지는 구 일본군에서 감히 '후배'가 '선배'에게 이런 수준으로 항의했음은 보통 일이 아니다. 더욱이 사나다는 [[삼간사우]]로 악명 높았던 인물. 그런 사람이 '선배님의 이 말 같지도 않은 작전을 진행하고 싶다면 저 빌어먹을 해군 놈들의 손까지 빌려야 한단 말입니다!' 하는 요지로 군복을 벗을 각오를 하고 반대한 셈이다. 그러나 이 결사적인 반대도 [[삼대오물]]로 유명한 육군참모총장 [[스기야마 하지메]]가 오로지 파벌만 생각하고 최종승인을 하며 막히고 말았다. >데라우치 씨 부탁이니 통과시켜주게. 그리고 [[쇼와 덴노|히로히토]]는 그렇게 올라간 보고서를 읽은 뒤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질문하였다. >'''이게 정말 현실적으로 가능한 작전인가?''' 사실 히로히토는 어린 시절 [[가쿠슈인]]에 입학했을 때부터 군사교육을 받았고 [[일본육군사관학교]]도 졸업했던 만큼 군대에 대해 아주 문외한은 아니었다.[* 심지어 참호전을 배울 때는 교사들이 궁궐 내에 기관총을 비치한 참호를 파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보다 식견이 낫다는 정도고, 사관학교는 물론 육군대학에서까지 교육을 받은 뒤 수십 년에 걸친 실전경험을 쌓은 직업군인들보다 더 나은 교육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이론으로만 군사교육을 받았던 아마추어가 수십 년 동안 실전을 거친 고급 장교들보다 더욱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